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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4-09-15 2여신도회 9월 말씀묵상-존중과 며느리발톱2020-11-07 14:33
작성자 Level 10

2여신도회 9월 말씀묵상-존중과 며느리발톱

sandcatjoe 님께서 2014-09-15 13:03, 2561 hits

2014년 2여신도회 표어는 ‘말씀과 나눔’입니다.
하여 올 한해, 미리 정해진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모임 때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9월 말씀 묵상 기록입니다.

글의 성격상 실명은 밝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 교우님들께서 댓글로 교우님들의 묵상을 나눠주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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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여신도회 큐티묵상
성경말씀 : 마태복음 7장 1절-5절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최근에 한국에서 일어난 윤 일병 사건을 접하고 한동안 중독된 것처럼 한국 뉴스를 계속 검색하고 지냈다. 너무 화가 났고, 분노가 치밀었으며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한 사람들을 욕했다. 그러다가 이 성경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한 대 탁, 치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을 비판하지 말아라.’ 내가 사람들을 막 비판하면서도 내 안에 있는 나쁜 것, 곧 ‘들보’는 내 화에 가려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든 것이다.

-윤 일병 사건은 사실, 다소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잘못된 것, 옳지 않은 부분, 불의, 사회악에 대해서 제 목소리를 내고 비판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본다. 이 성경 구절에서는 비판을 할 때는 제대로 된 비판, 즉 자아 성찰과 자기반성을 전제로 한 비판을 하라는 말씀인 것 같다.

-어떤 종류의 성경을 보고 계신지 모르지만, 내 성경책에는 ‘비판’이 아니라 ‘심판’으로 나와 있다. 독일어 성경의 단어를 참조하건대 ‘비판’보다는 ‘심판’이 맞는 것 같다. ‘비판’은 남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때 할 수 있지만 ‘심판’은 그 어감상 아무래도 ‘판결’과 가까운 느낌이다.

-우리 모두는 죄에 가려져 있어서 연약하다. 우선 우리는 그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허물보다는 나의 죄와 연약함을 봐야 하는데, 역시 죄에 가려져 있으므로 그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5절이 곧 이 말씀의 결론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 아무리 자신의 죄를 스스로 알고 있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 또한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성경에 비추어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우리의 죄 가운데 주님 오시기를 소망할 뿐이다. 내가 먼저 깨닫고, 내가 먼저 변해야 남 눈의 티도 빼낸다. 여기서 ‘티를 빼’낼 때는 “사랑으로써”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티를 빼냄으로써 ‘사랑의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복음을 전하라는 또 하나의 메시지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다.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의견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그냥 대가 없이 도와주면 된다. 그런데 그걸 못하고 꼭 남을 비판하게 된다.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비판하는 것이다. 그저 내 기준, 내 잣대, 내 욕심으로만 채워져서 나도 모르게 남을 정죄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잘못한 게 많은데 비판하고 정죄하고 남이 못하면 “똑바로 해, 그것도 못해?” 나무라면서 말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못하면서 직접 비판을 않더라도 은근히 돌려서 얘기한다. 간접적으로 그 사람을 웃음거리 삼아 얘기하는 것도 정죄의 하나에 해당된다고 본다.

-비판을 하는 사람, 정죄를 하는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내가 훨씬 우위에 있다는 생각, 나는 깨끗하다는 자기 만족감에 기대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한국사회에 큰 사건이나 일이 터지면 열변을 토하고 쉽게 광분한다. 그럴 때 나는 개인적으로, 흥분하지만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직접 행동으로 나서길 바란다. ‘즉문즉설 강연회’로 최근에 베를린에 오신 법륜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짜증이나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변인들처럼 나도 나의 것을, 나의 일을 그저 무심하게 하면 되는 것인데 그걸 사람들이 못한다고 하셨다. 그 사람이 나와 다르면, 그저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인정하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맞다고 본다.

-이 구절을 읽고 내 옛날 모습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나는 그 구절을 보고 문자적으로 천착하고 몰입했었다. 들보? 내 눈에 들보는 어디 있을까? 들보는 뭐지? (웃음) 조금 더 커서는 차츰 이 구절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에게도 흠이 많은데 사람이 공동체 집단에 속하게 되면 아무래도 그 공동체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전체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경향이 있다. 교회 공동체나 학교 등이 좋은 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 데에는 꼭 그 사람만의 이유가, 배경이 있게 마련이다.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연유를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공동체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덮어놓고 주변 분위기에 묻어가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특히나 그런 부분에 대해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부분 내 잣대, 기준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아이가 하는 건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틀린 것인 양 몰아붙인다. 지금 와서 돌아보건대 아이가 무슨 행동을 할 때 ‘심판이 아닌 존중’을 해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된다. ‘엄마 생각은 이런데 너 생각은 어떠니?“하고 물어봐주어야 한다. 아이 생각이 뭔지 알고 나면, 엄마인 나도 사실 배우는 게 많다. 한마디로 내가 다 안다고 착각한 거였다. 아이를 존중해주었더라면 훨씬 더 성숙한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이를 계속 내 잣대로 심판하려고 들면 갈등 관계가 된다. 이건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늘 평화롭게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내 경우, 마음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건 ‘말씀 묵상’이다. 말씀을 받아서 이 구절이 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침에 한 번 묵상하고 나면 일단은 차분해지고, 돌발 상황이 생겨도 침착하게 대응이 되곤 했다, 진지하게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하루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이 묵상을 거르고 돌발상황이 닥치면 우왕좌왕, 흥분하게 된다. 나에게는 아침의 이 시간이 보배로운 시간, 진주 같은 시간이다.

-우리는 사실, 내가 그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있어 다른 사람을 심판하게 된다. 예전에 한 번 말씀을 나누는 자리에서 나눈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지체이고 또한 가장 작은 자임을 깨닫자는 취지였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신체 중 한 군데 제일 못 낫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의 경우는 ‘며느리발톱’이 그곳이다.

나는 내 새끼발가락에 있는 며느리발톱이 제일 싫고, 제일 못생긴 것 같고, 늘 걸리적거린다. 나는 그 말씀을 보면서 제일 떼어내고 싶은 부분, ‘며느리발톱’이 바로 주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라는 지체라는 깨달음이 왔다. 내가 그렇게 못난 사람인데, 하나님은 나의 어디를 예뻐해서 못난 이 나를 위해 외아들을 내놓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믿는 자들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겸손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창녀를 정죄하고자 했을 때처럼, 다른 이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내 죄는 저 사람보다 가벼워 하고 내심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 던지라’ 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때 사람들이 그나마 낫지 않나? 지금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더 낫다고 모두가 돌을 던질 것 같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완악해진 것 같다.

-다 같이 죄에 빠져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확실한 죄,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한 것도 오히려 감싸주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죄를, 불법을, 부정을 서로 눈감고 감싸주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는데 잘못된 걸 그냥 두고 봐야 할까, 그것도 문제다.

-내 것도 못 고치고 다른 사람을 고치는 것이 가능할까? 나랑 가장 가까운 남편을 변화시킨다고 말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나부터 변해야 한다.

-6절을 보면 ‘개에게,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구절이 나온다. 심판은 마지막 날에 가서 하나님께 받는 것이지 우리 몫이 아니다.

-나는 이 말씀이 ‘경고’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사람 입장을 생각하기 전에 내 상황에서, 내 잣대로 판단한 것은 그대로 하나님이 나중에 돌려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주기도문에도 있듯이 내가 용서한 것이 나를 용서한다.

-헌금을 하려고 왔다가도 형제를 마음 아프게 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해하고 나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나.

-언젠가 어떤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아들을 죽인 사형수와 그 엄마에 대한 것이다. 그 아랍국가에서는 저지른 죄와 똑같은 벌을 당하는 법 때문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목에 줄을 매단 채 의자에 앉힌 후, 피해자의 가족이 직접 그 의자를 빼내는 교수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을 잃은 엄마는, 딱 한 번 따귀를 때리고 ‘너의 목숨을 없앤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진 않을 것이고, 나는 너의 목숨을 뺏을 권리는 없다’면서 범인을 살려줬다는 기사였다. 아마 그 엄마는 세상 최고의 고통 가운데 있었을 것인데도 결국 그 사람을 용서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는 최악의 상황이 아닌데도 너무 쉽게 타인에게 무거운 정죄를 내리고 만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암묵적으로 언급 자체를 안 해 버리는 것도 일종의 ‘정죄’로 볼 수 있다. 거론하지 않고 무시하듯, 지나가는 것도 엄연히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죄,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을 누군가가 짚어줘야 하는데 기독교인으로서는 그 잣대가 성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후회하고 용서하고…. 평생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인간은 온전치 못하다. 현재는 지속적이지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그 지혜로운 솔로몬도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았나. 평소에, 일상에서 갈고 닦는 게 중요하다.

-대학교 때 한 교수님이 데모하지 말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모습을 먼저 만들어가는 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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