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여신도회 표어는 ‘말씀과 나눔’입니다.
하여 올 한해, 미리 정해진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모임 때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7월 큐티 묵상 기록으로 두 번에 나눠 올립니다.
글의 성격상 실명은 밝히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 교우님들께서 댓글로 교우님들의 묵상을 나눠주시길 소망합니다. 정리 / 정유진(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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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순수한 질문
성경 구절 : 요한복음 3장 1-21절
-오늘의 성경말씀 역시 익히 알려진 구절이네요.
-저는 이 말씀을 읽고 어렸을 때 교회에서 하던 성경공부가 생각났어요. 그런데 제가 사실은 아직까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어 부끄러웠습니다.
니고데모가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이고, 신실한 사람이었는데 왜 한밤중에 일부러 주님을 찾아갔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그의 질문에 대해 동문서답을 하셨을까요? 그런데 그 동문서답이 지금에 와서 보니 핵심이었어요. 엉뚱한 대답을 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귀한 진리였던 거지요. 지금은 그게 궁금하네요. 니고데모가 과연 그 말이 핵심인 걸 깨달았을까, 하고요.
-저는 이번에 1절이 새삼 눈에 들어왔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면 그 시대에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을 텐데요. 말씀은 이미 이해하고 잘 알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라 또다시 예수님을 찾아간 것 같아요. 말씀을 아는 것과 사모하는 건은 다른 건데, 그건 바로 내 심령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요. 제 개인적으로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요. ‘내 삶은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 구원받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나.’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성경을 읽는데 그러다가 ‘거듭남’이란 말이 번쩍 눈에 들어왔어요.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주님의 의도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근데 나 스스로가 잘나서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이 모범을 보여주셨으므로, 주님의 힘으로, 비로소 주님처럼 살 수 있는 거지요. 3절 말씀에도 ‘거듭남’이란 말이 나오는데요. 한 번 거듭남으로 인해 삶이 바뀌는 건 맞는데 그 변화가 지속적이지 않은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배운 찬송가 있잖아요.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그 노래처럼 돈으로도, 힘으로도 못 가는 게 하나님 나라잖아요. 어렸을 때 “거듭남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 모든 의미가 여기 요한복음 3장에 들어가 있구나. 요한복음 3장은 그래서 정말 보석 같은 장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요. 우리가 방금 전에 불렀던 찬송 2개가 모두 지금의 삶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찬양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찬송 내용이 이 성경구절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음에 올 세상.
-다음에 올 세상을 기다릴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야지요. 예수님을 천국 가서 어떻게 만날까가 아니라 지금의 삶 자체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영생을 믿지 않는 경우와 믿는 경우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 같아요. 그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영생을 믿어야 하지만, 그것에 비춰 세상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건 안 좋은 것 같아요.
-영생을 믿지 않으면, 사실 현실의 삶이 너무 힘들어지지요.
-니고데모는 학식이 높은 사람이잖아요. 알긴 아는데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거고요. 니고데모는 나름 고뇌를 했던 것 같아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음을 깨달았을 수도 있지요. 니고데모의 삶은 사도 바울과 참 대조되는 것 같아요. 같은 바리새파 사람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 연구했어요. 이후에 니고데모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지네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때가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달리기 전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미미하던 때라는 거지요. 우리는 ‘부활’이라는 큰 증거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믿음을 갖기 쉬운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진리를 행하는 자는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진리를 행하게 되는 거지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라”.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태어난 건데 그럼 하나님을 만나기 전은 어떤 때였을까 생각해봤어요. 그 전에는 나의 영이 죽어 있었고 하나님을 믿고 나서 바뀌었다고 봐요. 그걸 ‘영’으로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내가 예전엔 죽음에 있었구나, 죽어 있었구나’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자기 행위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영적으로 ‘악’에 있다가 깨어나는 거지요.
-본문에도 나오듯이, 우리의 삶이 악의 습관에 물들어 있다는 거지요. 시험에 든다는 의미와도 상통하구요. 그러니 맨날 자기 안에서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맨 처음 넘어야 할 산이 그거라고 봐요. 악의 습관에서 빠져 나와 싸워서 이기고, 내 모습을 비춰보는 것. 근데 19절 말씀 보면서, 일상을 살면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지 않나, 반성하게 됐어요. 나 스스로 빛보다는 어둠을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어둠과 종종 손잡으면서 그렇게…….
-어둠 속에 있으면 사실 빛으로 나오고 싶지 않게 돼요. 내 행위가 빛 속에서 드러날까 봐 두려운 거지요. 우리는 빛을 보고 쉽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감당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둠 속에 있으면 영생 즉, 빛으로 나아가기 힘들구요.
-개인적인 경험담인데요 신호등 앞에서 눈을 감고, 앞이 보이지 않은 맹인의 삶을 잠깐 체험한 일이 있어요. 신호등 신호가 초록이 되면, 맹인을 위한 소리 신호음은 작아지고, 빨강불이 되면 소리가 거꾸로 커지더라구요. 위험하니까 경고의 의미로 소리가 커지는 거라는 걸 그때 깨달았는데요,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는데도 눈을 떴더니 얼마나 눈이 아프던지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에서 빛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야지 갑작스럽게, 한꺼번에 빛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혼자서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관심 가져주고 책망도 해주고. 그렇게 같이 손잡고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 하셨는데, 우리만의 사랑만으로는 내 자식 사랑하기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같이 가라는 뜻이겠지요.
-이 성경구절을 추천해주신 분께 여쭐게요. 이 성경구절을 추천하신 이유가 있나요?
-성경을 보니 좋은 말씀들이 너무 많더군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어렸을 때 암송했는데 살면서 그 구절이 진국임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도 너무 좋아서 이 구절로 결정했어요.
때로 제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요. 저에게 있어 신앙은 모태신앙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교회에서 자랐고, 교회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성장시절을 보냈어요.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저는 니고데모의 입장에 가까운데, 니고데모도 뒤늦게 신앙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모태신앙이어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모태신앙을 가진 분들은 ‘믿음의 기도로 자라난 분들’이니 늘 부러워요.
-니고데모는 아까 말한 것처럼 바리새파의 지도자예요. 성경에 대해서는 알 건 다 알고 있는 인물이지요. 그런데 어떤 다른 고민이 있어 밤에까지 찾아가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니고데모든 한마디로 열정이 있는 사람 같아요. ‘예수와 나’, ‘예수와 000’ 이렇게 한 번 자기 이름을 예수님 옆에다 넣어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 하는 기도는 항상 궁색하고,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달라고 하는 저질 기도가 아닌가 반성해요. 구하는 걸 달라고 하는 식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가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 근데 이런 계산 없이, 그냥 만나면 안 될까, 가끔 생각합니다. 너무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모습을 회개하고 싶어요.
제가 만약 니고데모의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는데요. 니고데모의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 사실 저는 픽 웃음이 났어요. 나는 한 번이라도 예수님께 웃음이 날 정도의 유치한 질문을 던져봤나, 예수님께 이해 안가는 건 안 가는 대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질문을 던져봤나 그런 반성이 들더라구요.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나 성경을 살펴봤더니 거듭남에는 ‘물과 성령’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세례를 받으며 예수님을 만난 것이라는 의미라면, 내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성령이 있다고 배웠거든요. 그게 없다면 스스로 질문해야겠지요.
시간이 중요하다고는 보지 않아요. 각자가 고민한 것, 예수님을 향한 열정 등……. 이건 개인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고민이 되면 우리 지체들이 합심하여 기도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갈급함이 있어야겠지요.
그런데 내가 정말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그런 의심이 들면 요한복음 19장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에도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근심했던 이들이 그 구절에 나옵니다. 저는 그걸 보고, ‘아.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쓰시는 구나’하고 생각해요. 나에게 확신이 없을지라도 우리 마음을 알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렇게 우리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라도 귀한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추측컨대 그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나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 나중에 갑자기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깨달음도 다를 거라고 봐요. 어렸을 때 들은 것, 최근에 들은 것이 다 다르게 다가오잖아요.
우리 2여신도에는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섞여 있어요. 하지만 니고데모처럼 순수한 질문을 하다 보면 나중에 귀한 것을 드리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각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차원에서 이 성경구절을 추천했습니다.
(계속)
Last edited by sandcatjoe (2014-07-15 2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