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을 보았습니다.
뚜렸이 얼굴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릴적 국민학교시절 좋아했던 친구이거나 아니면 고등학교시절 학원새벽반에서 같이 공부했던 여학생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모두 다 제대로 사귀어 보지는 못하고 그리워만 하다가 헤어지게 된 인연들입니다.
어젯밤 꿈에 어디론가 학교에서 여행을 가는데 시간이 남아 혼자서 학교를 떠나 멀리 배회를 하다가 여행출발 시간이 다된 것 같아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데 여행에 타고 갈 버스가 벌써 나를 지나 학교 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을 못가게 된다는 생각보단 그리워하는 친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달음박질을 치는데 실제로 발은 움직여지질 않고 버스는 점점 멀리 사라지는 꿈이 었습니다.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을까 생각을 하면서 50대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내가 지금 잃어버릴 것 같은 님은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창시절 배웠던 만해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이란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래에 옮겨봅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는 시집의 서문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라고 썼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 님은 잃어버린 조국이었겠지만 오늘을 사는 소시민에게는 다가가지 못하거나 또는 이루고 싶어하는 먼 발치의 기대 또는 소망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봅니다.
다시 독일로 들어 오면서 이번에는 독일 생활을 정말로 행복하게 가꾸어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곤 독일어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구요. 하지만 나이 50이 넘어 독일어를 능숙하게 하려는 생각은 아마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시도하는 헛된 일이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처리해야 될 다른 사안들도 있고 또 여러가지 생각에 제대로 독일어 공부를 하지 못하고 독일TV 시청으로 적당히 마음에 안위를 만들고 잠자리에 들어 버리는 게 일상인 것 같습니다. 어제 토요일 열심히 독일어공부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막상은 그리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다가 (또 다른 님을 생각했겠지요..) 잠자리에 들어버린 것이 이런 꿈을 꾸게한 원인이 아니가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독일에서의 다시 주어진 삶이 내게 또 다른 님을 찾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가 생각해봅니다.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삶을 삶아가면서 가는 곳마다 정을 주고 받고 살면서 그 곳서 님을 찾으려고 하나 그리 쉽게 님을 만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캐나다서도 그랬고 여러 번의 독일 생활에서도 그리했던 것 같습니다. 외국 생활을 오래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도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다고 들었는데 공감이 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꿈 이야기를 집사람에게 하니 역정부터 냅니다. 님 옆에 두고 웬 다른 님이야기냐고. 나는 춘향전에 나오는 월매 같은 퇴기냐고 합니다 ㅎㅎ.
자초지종 꿈 이야기를 풀어주니 독일어 공부 시겨주겠다고 저를 책상에 붙잡고 훈육을 시작합니다. 진짜 님이 꿈 속에 그리워한 님을 만나게 하여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다시 진짜 님을 보았습니다.
만해는 깨달음을 얻은 후 오도송에서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의 수심에 잠겼던가. 한마디 소리쳐 우주를 설파하니 눈 속의 복숭아꽃 붉게 붉게 나부낀다”라고 읊었다고 합니다.
이를 소시민 버전으로 바꾸어 보면..
“ 내가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얼마나 많이 나그네의 수심에 잠겼던가. 가만히 삶의 행복 살펴보니 부얶서 점심 준비하는 님의 손길에 고향의 향취가 넘쳐나네..”
그리고 보니 사순절이 시작되었네요..
기독교인에게 님중에 님은 예수님이겠지요.
만해의 오도송을 기독교 버전으로 이렇게 적어 봅니다.
“믿은 자 이르는 교회 어디나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의 수심에 잠겼던가. 말씀하시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 십자가 사랑에 본향의 기쁨 이곳서 미리 맛보네”